한동끝시간은 한동대학교에서 매일 밤 9시반마다 한동대 재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땅에 무너진 영역들을 회복하고자 기도 해온 학생들의 귀한 모임 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북한과 통일을 위해 중보하는 월요끝시간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월요끝시간 기도회> 섹션에는 필자가 월요끝시간에서 전한 메시지들을 담았습니다.
#월요끝시간 #고통의문제_고난의신비
(창세기 45장 1-11절)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제목: 고통의 문제, 고난의 신비]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도대체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한 것인가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도대체 제 삶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왜 이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들 중에 인생에서 한번이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을 만나셨던 분이 계시다면, 혹은 여러분의 가족이나 이웃이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보신 분이 계시다면, 아마도 방금 그 질문들을, 아니 그냥 질문이라기 보다는 그 반항심 섞인 절규를 토해내신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고통의 문제, 고난의 신비> 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잠시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쓴 뿌리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현존하는 고통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수로 잡은 뜨거운 냄비로부터 느끼는 그 순간적인 고통에서부터 질병이나 사고, 범죄로 인한 고통, 그리고 정신적 고통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고통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고통은 크기도 다양합니다. 어떠한 고통들은 한바탕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 뒤 얻는 근육통과 같이 오히려 개운하고 가벼운 것들도 있는가 하면, 어떠한 고통들은 그 사람도 모르는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서 해결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이 해결되지 않은 상처, 응어리가 가슴에 남고 쌓이고 자라서 쓴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하나님, 왜요?’ ‘왜 그러셨어요?’
신앙이 있다고 해서 여기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영혼을 짓누르고 감사를 빼앗아갑니다.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저는 그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왜 접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라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로 만드는 고통을 겪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감히 어찌 다 알겠습니까? 제가 어찌 다 이해하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은 존재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쓴 뿌리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2) 사랑이었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런데요. 그게 사랑이었답니다. ‘그게 은혜였노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궤변이 이해가 가시는지요?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도 고통은 존재했습니다. 제자들도 이 문제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부모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 하느냐고 비판하실 것입니다.
군대에서 신앙적으로 방황하며 고민할 때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입니다. 고통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냐는 그 질문에 대해 저자는 그것이 결국 궤변이 아니라 진리라는 답변을 매우 영적이고 매우 논리적인 언어로 차근차근 풀어갑니다. 그 책에서 몇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 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pp. 76, 제3장 하나님의 선함)
“사랑은 본질상 그 연인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허용하려 드는 단순한 ‘친절’은 사랑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p. 73, 제3장 하나님의 선함)
“고통은 즉시 인지되는 악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악이기도 합니다. (…)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pp. 155, 제6장 인간의 고통)
남들이 궤변이라는 그 논리. 고통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냐지만 그게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따뜻한 손길로 이해가 될 때 비로소 상처가 치유됩니다. 우리 가슴의 쓴 뿌리가 녹아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3) 이 땅에서 요셉의 고백을 듣기를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한 인물들이 여럿 있지만 창세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요셉을 뽑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부러운 성공스토리로 보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요셉의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묵상하면 그가 겪은 고통이 그에게 영원한 상처를 주고도 남았을 고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쓴 뿌리를 가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요셉이었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타국에 노예로 팔려간 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일, 어머니 없이, 아버지 없어, 형제들 없이 홀로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는 누구보다 상처를 많이 입었을 것이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원망해야 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통과한 고통과 고난의 터널의 끝에서 그의 고백을 들으면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차오릅니다.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그는 그 자신의 고통이 결국에는 사랑이었고,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유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국 모든 말씀은 예수로 이어집니다. 예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가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고통이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고난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통일의 영역에서 ‘요셉들’을 보기를 원합니다. 북한에서 우리의 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의 상상 이상입니다. 그 고통과 고난의 쓴 뿌리들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오늘은 찬양영상 대신에 지성호 형제님 간증을 잠깐 듣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고통과 고난을 잠시 헤아려보고 고통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기도제목]
∙‘[탈북자 지성호씨의 절규] / 북한은 국민을 죽이는 거대한 감옥이다’ (링크: https://youtu.be/bE_E2j-ZSxs)
오늘 함께 본 영상의 주인공인 지성호씨가 고백합니다. “북한 주민들이여, 죽지 말고 살아남아 달라.” 그의 고백은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지 나 자신만 잘 되라고 주신 자리가 아니다. 주변을 살피고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압제 속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눈물을 닦으라는 주님의 뜻이다” “북한에 자유와 복음을 전하고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저를 세우신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 내 영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천만 기독교인들이 절 위해 기도해주시고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으면 한다” “아무런 연고 없이 오직 하나님만 따라 이 자리까지 왔다. 앞으로도 하나님만 의지할 것이다”
1. 말씀 붙들고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는 쓴 뿌리가 있다면 그것을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 나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받아들일 수 있도록
- 결국에는 요셉의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은혜였다.)
2. 대한민국과 북한,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탈북민 동포들 중에서 고통과 고난의 시험을 통과하여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보내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세워지도록
-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국민들이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북한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켜 주시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영역에서 흉년의 때를 예비할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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