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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끝시간 기도회

내가 그니라 (요한복음 4장 19-26절)

by 버닝우드 2020. 10. 28.

한동끝시간은 한동대학교에서 매일 밤 9시반마다 한동대 재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땅에 무너진 영역들을 회복하고자 기도 해온 학생들의 귀한 모임 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북한과 통일을 위해 중보하는 월요끝시간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월요끝시간 기도회> 섹션에는 필자가 월요끝시간에서 전한 메시지들을 담았습니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메시지 제목: 내가 그니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는 <테넷> 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셉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로도 유명한 놀란 감독의 작품의 특징은 시간이나 공간을 영화의 소재로 활용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겁니다. 특히 그의 작품 속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뒤죽박죽 배치되기도 하고, 과거 속에 현재, 현재 속에 미래와 같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직선적인 시간 관념이 서로 꼬여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체 본문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요한복음 4장에는 정말 너무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이 요한복음 4장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는 이 역사의 교차점에서 우리 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유일한 한 인물이 서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그니라> 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잠깐 나누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1) 야곱과 요셉, 그리고 이스라엘

 

요한복음 4장의 시작 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5-6)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

 

여기서 잠시 과거로 가겠습니다. 야곱이 누굽니까?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에게는 아들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쌍둥이였죠. 첫째가 에서였고, 둘째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이름의 뜻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뜻이 ‘발 뒤꿈치를 잡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발 뒤꿈치를 잡다,’ ‘뒤꿈치를 상하게 하다’ 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뱀, 사단을 저주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 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야곱의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너무 안 좋은 이름이죠. 그래서 그런지 야곱은 성격도 좀 얍삽합니다. 사기꾼 기질이 있습니다.

 

야곱은 주로 장막에, 그러니까 집에 머물며 집안 일을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야곱은 집돌이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완전 상남자였습니다. 들의 사람이라 불리며 몸이 붉고 털도 많고 사냥도 잘했습니다. 항상 바깥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습니다. 이삭은 장남인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사냥도 잘 하는데 심지어 요리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얍삽한 야곱이 자신의 형에게 어떤 일을 저지릅니까? 형이 사냥을 마치고 엄청 배고픈 상태로 왔을 때 팥죽을 끓여 놨다가 팥죽과 형의 장자권을 맞바꾸자 라는 제안을 해서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물론 야곱이 얍삽하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에서는 왜 팥죽 한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것일까요?

 

가족사가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가나안 땅. 언제부터 거기 살았습니까? 그들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라고 하셔서 현재 그들이 있는 땅으로 오게 됩니다. 근데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갈대아 우르.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감이 잡히시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신뢰하면서 가장 발전된 지역,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누리던 지역에서 깡촌, 시골,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와 있었던 겁니다. 왜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민족을 일으키리라.’

 

자,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대한 스토리에 매료된 한 찌질이가 있습니다. 누구였죠? 야곱이었습니다. 그는 집돌이였기 때문에 주로 장막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대를 보면, 성경에는 기록이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동시대를 생존한 기간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말인즉슨 이 집돌이 야곱이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직접 그들의 스토리와 간증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어떻습니까? 에서는 집에 붙어 있지를 않습니다.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도대체 왜! 그 좋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떠나서 이 깡촌 시골로 온거야? 여긴 별볼일 없어. 아무것도 없어!’ 우리랑 조금 비슷하지 않나요? ‘아니 학교로 왜 여기 지은 거야? 수도권에다가 짓지. 여긴 뭐가 없어.’ 그리고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담겨있는 자신의 장자권을 멸시합니다.

 

자,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나중에는 심지어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챕니다. 야곱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 지 보이시죠?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고 야곱은 친척 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칩니다. 이 과정이 길지만, 이 도망 가는 길에서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 개입을 하십니다.

 

어쨌거나 삼촌 집에 가는데 그 이후로도 많은 일이 있습니다. 아내도 두 명이나 생기고, 삼촌과 갈등이 생겨서 이래저래 문제가 발생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가축들까지, 큰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 길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옵니다. 잘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까지 모두 끝장이 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놓아주지를 않자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 뼈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합니다. 이 부위가 어긋나면 사람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내 힘의 근원을 끊어 버리시는 겁니다. 야곱은 절박하게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버리십니다. 앞으로 너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인류 역사상 한 사람의 이름이 그 국가의 이름이 된 경우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이스라엘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약속은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 내려갑니다. 생물학적 장자 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 갖고 싶었던 이 야곱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야곱 다음은 누구일까요? 요셉이었을까요?

 

아시다시피 야곱은 아내가 두 명이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야곱은 자신의 아내들이 낳은 아들들과 자신의 아내들의 몸종들이 낳은 아들들을 포함해 12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야곱이 인간적으로 더 애정을 가졌던 아내는 라헬이었고 당연한 결과로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에게 더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는 야곱이 요셉을 훨씬 편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셉의 별명은 꿈쟁이, 꿈꾸는 자… 요셉은 자신의 부모님을 포함한 형제들이 모두 자신에게 머리 숙여 절을 하는 내용의 꿈을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안 그래도 야곱으로부터 편애를 받았던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조롱하고 괴롭히다가 심지어는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짓까지 벌이게 됩니다.

 

(창세기 37:18-20)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우리가 듣는 조롱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동의 비전을 얘기할 때, 우리가 한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복음통일과 북한해방을 이야기할 때, 보라 저기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말처럼 들립니다. ‘현실을 봐라.’ ‘정신 좀 차려라.’ ‘꿈 깨라.’

 

이 이후의 스토리는 다들 아시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노예로 팔린 요셉은 이집트에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다가올 기근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근의 때에 식량이 떨어진 야곱의 아들들이 생존을 위해 곡식을 빌리러 옵니다. 요셉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의 형제들을 시험합니다. 그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그들 스스로 무고함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베냐민에게 요셉이 누명을 씌어 붙잡으려고 하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4:30-31)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여! 이 아이의 생명과 우리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어서, 이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는 죽습니다. 제가 제 생명을 담보하고 죄짐을 지겠으니 저 아이는 돌려 보내주십시오.’

 

유다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밝힙니다. 이 유다의 고백, 유다의 자기희생이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결국 넷째 아들 유다가 야곱의 뒤를 이어 믿음의 계보 장자권을 이어가게 되며, 예수님 또한 유다 지파의 자손으로 오시게 됩니다.

 

(2) 내가 그니라

 

자, 이제 필름이 감기는 것처럼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이런 긴 스토리가 담겨 있는 야곱의 우물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을 거십니다. “물을 좀 달라.” 사마리아 여인이 응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엉뚱하게 자신이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자는 반문합니다. “당신은 물을 길을 그릇도 없지 않습니까?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의 우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예수님은 자기 물을 홍보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 비꼬는 것일지 몰라도 여자는 그 말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저에게도 좀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을 찔러 버리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와라.” 여자는 말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자가 가장 갈급 했던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네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여자는 까무러치게 놀랍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 ‘아! 이분은 뭔가 다르다. 이 사람은 뭔가 달라. 이 사람에게는 뭔가 나의 고민, 나의 문제, 나의 영적인 문제를 풀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느꼈을 때, 여자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이 진지하고 영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저기요. 우리 조상들은 여기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저쪽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던데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4)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제 여자가 묻습니다. 있잖아요. 내가 알기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는데요.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겁니다.” 예수님은 이 말이 나올 때까지 여자와 대화를 하신 겁니다. 이 질문이 나오길 기다리며 여자와 대화하시고 자기 물을 막 홍보하시고, 여자의 내면에 진지한 문제를 관통하시고, 그 여자의 영혼을 흔드신 겁니다. 여자의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이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자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겁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내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다. 내가 야곱이 그렇게 갈망했던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유다가 예표했던, 요셉이 예표했던 그 사람이다! 내가 그다!”

 

여자가 이 포인트에서 물동이를 던집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뛰어 갑니다. 그들에게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하는 사이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음식을 드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32-34)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기도제목]

1.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시다.

-      창세기의 사건들이 계시하고 있는 진리는 결국 자기희생, 자기부인, 십자가를 통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붙들고 우리가 믿음의 계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한동대학교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      한동이 특별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두기 때문임을 기억하며 한동이 우리 자신의 어떠함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두며 믿음의 계보를 이어 나가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북한해방과 복음통일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      우리의 양식은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과 통일을 위해 중보하며 그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질과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환경과 물질적인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문제의 해결과 동시에 복음으로 영적인 문제가 풀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셨던 분, 태초부터 우리에게 오시리라 예언되었던 분, 태초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와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던 분, 바로 예수님 당신이 그분이십니다. 태초부터 그분의 언약과 십자가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약속을 붙드는 자들을 믿음의 계보로 삼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동을 하나님의 대학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붙드는 학교로 세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배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동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성취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세대에 주신 북한해방과 복음통일의 사명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통일만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행복과 소망을 주는 통일이 됨을 깨달아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영광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