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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끝시간 기도회

신앙은 감정이다 (마태복음 11장 16-17)

by 버닝우드 2020. 10. 31.

한동끝시간은 한동대학교에서 매일 밤 9시반마다 한동대 재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땅에 무너진 영역들을 회복하고자 기도 해온 학생들의 귀한 모임 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북한과 통일을 위해 중보하는 월요끝시간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월요끝시간 기도회> 섹션에는 필자가 월요끝시간에서 전한 메시지들을 담았습니다.


 

(마태복음 11:16-17)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멘)

 

[메시지 제목: 신앙은 감정이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에, 이 위대한 부흥에 대해 기록하며, ‘참된 부흥이란 뭘까?’ ‘참된 신앙이란 무엇일까?’ 에 대해 고민하고, 뛰어난 설교와 메시지를 남겼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라는 설교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 시기에 나타난 여러가지 부흥의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부흥을 ‘광신주의’ 또는 ‘감정주의’로 매도하는 여러가지 목소리들에 대해, ‘이 은혜의 기간은 거룩하신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을 변호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러한 참된 신앙에서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날카로운 성경적 통찰과 함께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역사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동시대 사람들과 후대에 글로 남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바로 ‘거룩한 신앙감정’ 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혼탁하고 혼란한 이 시대를 살면서, 때로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누구의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혼란함이 무섭고 싫어서 아예 신앙에서 감정을 배제해 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에서 참된 신앙이 고조되면 거룩하고 신령한 감정 역시 함께 일어난다.”

 

라고 하면서, 고조된 감정 자체가 그 사람이 하는 신앙고백의 실재를 증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 없는 신앙고백은 그것이 가진 허구성을 분명히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어떠한 신앙감정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신앙은 감정이다> 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짧게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지, 정, 의를 가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

 

우리는 간혹 설교를 통해 이런 말을 듣곤 합니다. ‘사람은 지, 정, 의를 가진 존재로서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활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만드실 때 두 가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지각할 수 있는 기능, 곧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성(understanding)’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정신(mind)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이 첫 번째 기능을 가리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물을 단순히 지각하고 깨닫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게 끌리는 기능입니다. 영혼은 중립적이거나 무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기뻐하거나 꺼려 하고,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기능을 가리켜 성향(inclination)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성향의 지배를 받아 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지(will)라고 하며, 이런 모든 기능을 통틀어 우리는 마음(heart)이라고 합니다.

 

정신이나 지성으로 지각한 것을 성향에 따라 기뻐하거나 싫어할 수 있고,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대상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어떤 개념이나 대상은 강렬한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것은 깊고 진심어린 기쁨을 불러옵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어떤 의견을 선택하거나 배제할 때 우리는 의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역동적이고, 지각 있고, 강렬한 의지의 활동만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감정(affection)이라는 말에 합당합니다. 의지를 활용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개념이나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행동의 방향에 대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가진 성향이 “아주 강렬하고 역동적이라면 그것은 사랑 (혹은 열망, 기쁨, 즐거움)의 감정과 같고, 만약 어떤 것을 많이 싫어하고 꺼린다면 그것은 미움이라는 감정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affection)은 단순한 감정(emotions) 혹은 느낌(feelings)과는 구분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affection)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느낌보다는 훨씬 심오하고 본질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지각에 기반하고, 심지어 때로는 우리의 몸을 일깨우고 움직일 만한 감정과 강렬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참된 영성 혹은 진정한 신앙은 주로 “영혼이 가진 의지와 성향이 역동적이고 생기 있게 움직이는 마음의 열렬한 활동” 곧 신앙감정이라고 말합니다.

 

(2)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감정

 

우리는 시편을 통해 다윗의 삶에 감정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이 경건하고 거룩한 감정들이 표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겸손하고 열렬한 사랑,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광과 놀라운 역사에 대한 찬양, 간절한 열망,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그리움과 목마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에 대한 감동적이고도 달콤한 감사, 하나님의 미쁘심과 능력으로 만족하는 영혼의 거룩한 환희와 승리, 이 땅을 지으신 솜씨와 성도들로 인한 기쁨과 사랑,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으로 인한 기쁨,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악으로 인한 탄식,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증오.” 이런 감정들은 단순히 다윗의 개인적인 열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공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 쓰여졌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과 영성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하나님의 보좌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사역자들의 모습이 종종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 보좌 곁에 서 있는 거룩한 천사들에 대해서 뛰어난 주석가 매튜 헨리 목사님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보좌를 시중드는 빛나고 복된 수행자들을 보라!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스랍’ 곧 ‘숯 피우는자’ 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이 그리고 죄를 대적하는 열심이 불타오른다. 그들은 그들의 빛에 비례하는 열심을 지니고 있고, 거룩한 지식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랑도 풍성히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영광이 된다.”

 

결국 우리 신앙의 본질이 되는 신앙감정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거룩하신 그분을 향한 강렬한 열망과 사랑, 그리고 동시에 그분이 미워하시는 죄에 대해서는 무서운 혐오와 분노를 동시에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혼란하고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신앙의 본질이 되는 신앙감정을 가지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당연히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공감하기보다 하나님이 나의 감정과 상황에 공감해주시기만을 바라는 것. 내 생각, 내 사상, 내 감정이 하나님의 것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해서,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시인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완전히 분열된 채로 다른 것에 공감하고 다른 것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

 

그런 이 세대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탄식하며 호소하십니다.

 

(마태복음 11:16-17)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멘)

 

지난 학기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자. 하나님을 누구보다 뜨겁게 열망하고 사랑하는 그 소년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의 조롱과 비난을 듣고 그의 마음에 거룩한 의분이 불타올랐을 때. ‘이 인간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내가 이 사람을 쳐 죽이겠다!’

 

다윗의 불타오르는 신앙감정에 두 사람이 다르게 반응합니다. 한 사람은 그의 큰형 엘리압입니다. 엘리압은 도리어 다윗에게 크게 분노하며 책망합니다. “네가 교만하여서! 네가 완악해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반면, 다윗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뜨겁게 열망하다 못해 그분을 대적하는 죄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가 타오르는 그 열심을 본 요나단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에 불을 붙입니다. 그런 다윗에 대해 요나단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윗을 지키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혼탁한 시대입니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지조차 헷갈려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에 공감하여야 할까요?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미워하여야 할까요?

 

우리가 이 시간 찬양하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마음을 내게 주십시오. 주님, 저를 보십시오. 저의 마음을 보십시오. 너무나 혼탁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면서, 헷갈리는게 두려워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감정까지도 모두 배제해 버리는…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너희가 나를 위해서는 공감하지 않는구나. 내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내가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구나…” 우리 마음이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은 아닌지.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시오.


 

[기도제목]

 

1. 우리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 시간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 무엇보다 우리가 부드러운 마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신앙감정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향한 감정이 너무나 차갑고 냉담하게 죽어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 감화 하시는 성령님께 구합시다.

 

성경은 마음의 완악함을 죄와 도덕적 반역의 핵심으로 표현합니다. “완악한 마음은 변화 받지 못한 마음, 곧 덕스러운 감정에 무감각한 마음, 완고하고 미련하고 감화되기 어려운 돌과 같이 무정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완악한 마음을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마음은 감정이 살아 있어 섬세하게 반응하고 감동하는 살과 같은 마음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부드러운” 마음은 “마땅히 감화 받아야 할 만한 것에 쉽게 감동 받는 마음”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아에게 명령을 내리신 것은 그가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신앙적이고 거룩한 감정에 쉽게 감화 받는 마음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영성이 꼭 감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감정이 없이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한 신앙에서 감정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것을 구합시다. 주여 저의 마음을 깨뜨려 주십시오! 저의 마음을 찢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더 열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는 신앙감정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 가도록!! 주여 이 시간 거룩한 감정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2. 죄를 대적하는 열심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이 시간 다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서 있던 거룩한 사역자들. 그들은 빛나는 화염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변함없이 불타오르는 강렬한 열망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대적하는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 앞에 설 수 없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는 죄를 누구보다 미워하며 대적하는 열심! 우리에게 그 감정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좋은 것이 좋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별나게 구냐고 합니다. 그러는 너는 그렇게 깨끗하냐고 합니다. 우리가 그 말에 동의하지 맙시다. 다윗의 큰형 엘리압처럼 자신이 골리앗에게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윗에게 공감하지 못할 망정, 다윗을 책망하고 다윗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우리가 죄를 대적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그 영혼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켜 버리는 그 죄를 미워합시다. 그 죄를 증오합시다. 그 죄를 혐오합시다.

 

주여, 그러나 우리는 그것조차 못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감정을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향해 질투하기까지 시기하시는 소멸하시는 불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3.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신앙감정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곳,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영혼에 공감합니다. 세상이 워낙 혼탁하고 마치 미친 것처럼 돌아가다 보니, 탈북한 우리 동포들이 아니라, 김정은에게 공감합니다. 김정은의 착한 의지는 믿어져도, 탈북 동포들의 증언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북한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 나라는 무엇에 공감하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가, 이 나라가 이 민족이 이제는 정신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곳.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영혼들. 하나님의 눈물이 흐르는 그곳에 우리가 눈물을 흘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시는 그곳에 우리도 분노를 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의 신앙감정이 바로 될 때 우리가 북한과 통일을 위해서도 바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평화, 그림만 좋은 평화,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평화가 아니라, 저 북한의 오늘도 죽어가는 저 영혼들을 영원히 해방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오늘 우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주여 오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마무리 기도]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주님, 우리 마음이 굳었습니다. 너무나 혼탁하고 혼란한 시대에, 속을까 두려워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서, 우리가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딱딱한 돌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반응하지 않는 마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 오늘도 가물어 메마른 땅에 생명의 단비를 내려 주셔서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새살 돋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감동 감화시켜 주시는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다시 드리오니, 기경하여 주시옵소서. 갈아 엎어 주시 옵소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자들로 당신이 바라보시는 영혼들을 향하여 울 수 있는 자들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는 미워하기를 타오르는 불과 같이 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거룩한 신앙감정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온전히 공감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에 동참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의 예배의 진정한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